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일 전투 (문단 편집) === 8월 8일-8월 20일: 독일군의 '암흑의 날' === || [[파일:battle-of-amiens-04.jpg]] || || 아미앵 전투 지도 || [[페르디낭 포슈]]는 [[더글러스 헤이그]]에게 영프연합군의 공세에 대해 수월한 작전 구성과 진행을 위해 프랑스 제 1군을 [[영국 원정군]] 총사령부 휘하에 배치시키는 한편, 영국원정군 총사령관 헤이그와 그의 군대에게 공세 작전을 구성할 전권을 제공하였다. 이에 헤이그는 매우 흡족해하며 영국 제 4군 사령관 롤린슨에게 공세를 위한 작전을 구성하라고 지시했다. 8월 8일, 영프연합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(더 자세한 내용은 [[아미앵 전투]] 참고). 당시 영프연합군과 마주한 독일 제 2군은 영프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낼 충분한 예비대와 포병대를 보유하지 못했으며, 더 나아가 롤린슨의 완벽한 기밀 유지로 인해 공격을 거의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. 이런 상황에서 형편없는 상태의 독일 제 2군은 영프연합군의 강력한 제병 합동 전술[* [[후티어 전술]]과 상당히 유사하다. 정확히는 후티어 전술은 독일군 특유의 전술이 아니며, 후티어 전술을 최초로 시행했던 건 초기 독일이 벨기에와 프랑스 일부를 점령하고 수비로 태세 전환하자 실지 회복을 위해서 공세에 나선 프랑스군에서 시행됐다. 돌격대로 유명한 스톰트루퍼처럼 프랑스에도 느투아예흐 드 트랑시라고 불리는 참호 청소병이 있었다.)] 앞에서 말 그대로 갈려버렸으며, 영국 제 4군은 하루만에 13km나 전진하면서 사실상 독일군의 참호전선을 완전히 뚫는데 성공하였다. 영국 제 4군을 돕는 역할이었던 프랑스 제 1군의 공격도 그럭저럭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6km를 전진하며 선전하였다. 전혀 예상치 못한 영프연합군의 강력한 공격에 아미앵 돌출부에 있던 독일군 전선은 붕괴했으며, 독일군 참모총장 [[에리히 루덴도르프]]는 이 날을 독일군의 '암흑의 날'이라고 회고했을 정도로 독일군 입장에선 참담한 날이었다고 볼 수 있다. 그러나, 8월 9일부터는 늘 그렇듯(?) 하늘을 찌르던 공격 기세가 [[공세종말점|감소하기 시작했다.]] 가면 갈수록 길어지는 보급선과 재빠른 독일군 예비대의 증강, 그리고 포격으로 파괴된 지형을 건너면서 진격 속도가 매우 더뎌진 것이다. 이는 춘계 공세 당시 독일군이나 [[수아송 전투]] 당시 프랑스군이 겪었던 딜레마이자, 1차 세계대전 내내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현상이기도 하다. 그렇게 8월 8일의 기세와 속도는 날이 지날수록 감소하여 독일군은 라인을 형성하여 퇴각전을 수행하였다. 8월 14일-16일 쯤 되면 영국군 제 4군 사령관 [[헨리 세뮤얼 롤린슨]]이 헤이그에게 독일군 참호선을 찍은 항공 사진을 보여주면서 더이상의 무리한 공세가 불가능하다고 하였으며, 이에 헤이그도 동의하면서 공세가 사그라들어갔다.[* 그나마 독일군이 압도적인 물량의 미군에 비해 유리한 것이 딱 하나 있긴 했는데, 바로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쌓은 실전경험이었다. 이것 덕분에 그나마 저항은 벌일 수 있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